韩语阅读:韩国的传记《世宗大王》

2011-01-02 00:51:50 韩国韩语

世宗大王 세중대왕

이병도
李丙燾

우리 나라의 역사를 읽어 보면,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세중대왕은 그 빛나는 업적이 후세에 길이 남을 걸출한 임금이다. 그러므로 대왕의 성품과 업적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것은 퍽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나는 제군들의 훌륭한 성장을 바라는 뜻에서, 대왕의 훌륭한 성품과, 주로 우리 문화의 창조에 기응한 대왕의공업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왕은 1397年에 태중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났고, 1419年에 왕위에 오르니, 나이 스물둘이었다. 그 때 대왕은, 그 용모의 우아함과 자질의 총명함이며 古今에 통달함과 강유를 겸비한 덕으로 하여 衆望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대왕이 중망의 초점이 됨이나 빛나는 업적을 이룩함이 모두 우연이 아니니, 우리는 대왕의 뛰어난 성품을 알아야겠다.
대왕은 열성과 근면과 사색의 인간이었다. 일찍이 글을 읽음에 백 번을 거듭하고, 어떤 고전은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하거니와,병환 중에서도 독서를 폐하는 일이 없었다. 太宗은 대왕을 世子로 삼을 때, "忠寧은 천성이 총명하고 호학불권하여, 모진 추위와 무더위에도 밤을 밝혀 독서하니, 손에서 책이 떠날 새가 없다." 했으며,대왕 자신도 "내가 궁중에서 팔짱을 끼고 한가로이 앉아 있던 적이 없다." 했다.
대왕은 비단 자신의 수학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매일에 다 그러했으니, 날마다 인시에 일어나 平明에 群臣의 朝會를 받았던 것 하나만으로 이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대왕은 세심한 분이었다. 훈민정음을 만들고도 실험을 거친 연후에야 반포한 일은, 대왕의 세심함이 어떠했던가 함을 잘 나타내 주는 예라 하겠다.
朴堧(박연)이 경을 만들었을 때의 일이다. 대왕은 중국의 경과 새 경의 소리를 비교해 듣고,
"중국의 경은 맞지 아니하되, 새 경은 바르고 소리도 청미하다. 다만, 한 군데의 소리가 맞지 아니함은 무슨 까닭인가?"
했다. 朴堧(박연)이 곧 경을 살펴보니, 먹줄 친 데까지 완전히 다 갈리지 아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에 그 돌을 갈아 먹줄을 없애니, 소리가 비로서 맞았다. 음악에 대한 대왕의 소양도 소양이려 니와, 그 세심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大王은 또 옳다고 믿는 바는 과감히 실천하는 분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극렬한 상서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성, 반포한 일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므로 대왕의 영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루한 선비들은 때때로 큰 벌을 받기도 했다.
大王은 과감한 실천력과 함께 따뜻한 사랑을 지닌 분이었다. 밤깊도록 집현전에서 공부를 하다 잠든 학사를 보면, 친히 어의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니, 그 사랑의 어떠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대왕은 특히 百性에 대한 사랑이 두터웠으니,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를 살펴보거나,
"우리 나라백성 중에 어찌 곤궁한 사람이 없겠느냐? 내가 궁중에서 자란 까닭으로 백성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자손들이 궁중에서 자라나 종사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니 가탄할 일이다."
고 한 대왕의 탄식을 생각해 보면, 백성에 대한 대왕의 사랑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잘 알 수 있다.

<世宗大王 銅像 (세종대왕 동상)>

그 때, 노비를 함부로 구살하는 일이 있었다. 대왕은 이를 금하면서,
"노비가 비록 천한 자라 하나 이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라, 어찌 함부로 죄 없는 자를 죽이랴? 임금의 덕은 삶을 좋이 여기 나니, 죄 없이 피살됨을 보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부터는, 비록 노비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 관에 고하지 아니하고 구살하는 자가 있으면 한결같이 법에 따라 엄단하겠다."
고 했다. 이 얼마나 두터운 사랑인가?
우리 문화발전에 끼친 대왕의업적 가운데 우선 들고 싶은 것은 집현전의 설치와각종 서적의 편찬이다.
집현전은 말하자면 일종의 왕리학술연구서라 할 것인데, 大王은 국내의 준재들을 여기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했으니, 수많은 인재가 여기서 쏟아져 나와 학술의 陸盛이 극에 달했다.
대왕은 또 한편으로 학자을 지도하여각종 서적을 편찬했는데, ≪農事直說≫, ≪八道地理志≫, ≪訓民正音≫, ≪석보상설≫ 등은 그 몇 예이다.
대왕의 업적으로서 우리가 가장 자랑하는 것은,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訓民正音의 창제라 하겠다. 대왕은 이를 창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용에도 힘썼으니, ≪月印千江之曲≫은 대왕 자신이 새 문자를 써서 지은 문학작품으로, 국문학의 고전이 되어 있다.
대왕은 또 활자를 고치고 인쇄술을 개혁하여,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인쇄 능률이 전일에 비하여 배 나 진보되었다고 한다. 이 또한 대왕의 공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왕은 우리 나라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데도 큰 공을 끼쳤으니, 위에 말한 朴堧(박연)을 발탁하여 傳來의 구악을 정리, 혁신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박연은 악서를 찬집하기도 하고, 새 악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고래의 악기와악곡 등을개량 또는 수정하는가 하면, 새로운 악곡을 창제하기도 했다.
대왕은 우리 나라가 농경 국가였던만큼 천문,기상 분야에도 크게 힘썼으니, '簡儀',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등의 발명은 그 결과의 몇 예이다.
또, 고금의 천문국를 참고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하고, 여러 역서를 참작하여 '七政算'을 편찬하게 했으며, 역관으로 하여금 북극의 고도를 측정하게 한 일도 있었다.
천문, 기상 분야에서 우리가 가장 경복하는 바는,세중 23년 (1441)에 鐵로 測雨器를 만들어 降雨量을 측정하게 하고, 같은 모양의 측우기를 각도에 배부하여 전국의 강우량 분부를 명확하게 밝힌 일이다. 유럽에서는 기구로써 강우량을 측정하는 일이 17세기에 비롯되었다고 하니, 우리는 그보다 2세기나 앞선 셈이다.
이와 관연하여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水標를 설치한 일이다.
대왕은 서울의 개천에 水標를 설치하여 빗물의 양을 측정하게 하고, 한강에도 수표를 세워 강물의 증감을 측정하도록 했다. 대왕은 실로 과학의 대왕이요, 발명의 대왕이기도 했던 것이다.
大王은 또 백성의 교화에 힘썼으니, '孝行錄', '삼강행실도'등을 널리 퍼뜨린 까닭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한글의 본 이름이 '훈민정음'이 곧 '백성[민]을 가르치는[훈] 바른[정] 소리[음]'란 뜻이니, 여기에도 대왕의 높은 뜻이 나타나 있다 하겠다.
나는 지금까지세중 대왕의 성품과 그 업적의 몇 예를 말해 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대왕이 얼마나 뛰어난 분이었던가를 짐작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줄 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왕의 높은 뜻을 펴는데 盡力한, 그 臣下들의 뜨거운 중실이다. 黃喜 같은 분은 仕退 후에도 불시의 부름이 있을까 하여 밤에도 옷을 벗지 않았다 하지 않는가?
나는 제군들이, 우리 역사를 부지런히 읽으며, 훌륭한, 한국인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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